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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일상 & 혼잣말

제5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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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적 그적, 정리되지 않는 생각...
전두환 씨가 향년 90세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하루 종일 TV매체에서 시끄럽고 특히, 내가 사는 지역 사람들에게는 큰 이슈인데, 진정한 사과도 없이 떠나 죽어서도 욕을 먹는 듯 보인다.
개인적으로 내 꼬꼬마 어린 시절, 잠시 내 고향을 들린 그를 카퍼레이드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잠시였지만 차 지붕을 열고 나와 손을 흔들던 그와 눈이 마주쳤던 기억이 있다. 지금 그때 그 장소를 가보면 차선이 내가 있던 곳이랑 가깝고 장소가 협소한데, 분명 작았던 나를 보았으리라 생각된다. 그 당시를 회상해보면, 난 그저 대통령이라는 사람을 보아서 무척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 뒤에 따라오던 경찰 오토바이들도.. 그는 내 생애 처음 실제로 본 대통령이다.
어릴 적엔 마냥 좋았던 그때 그 대통령, 하지만 커가니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사는 지역 특성상 치유되지 못한 5월 18일의 아픔 때문인 거 같다. 오죽하면 충장로에 전시된 철창 속 전두환 동상의 두개골이 갈라졌을까.. 그것도 뿅망치로 때리는데 말이다..

작년 충장로 전두환 동상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이곳 고속버스터미널에서는 이상한 비디오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5.18광주 사태라는 비디오였는데 기억으로는 터미널 내에서 몇몇 사람이 끔찍한 사진들을 전시해놓고 판매했었던 거 같다. 부모님이 결국 하나 구매하셨는데, 난 그것을 어릴 적에 엉겁결에 보았다. 하지만, 어린 꼬꼬마가 보기엔 끔찍한 장면들, 시끄러운 소음, 필름 끊긴 공포영화와도 같은 그 비디오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게 지금 생각하니 5월 18일의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실제 촬영한 비디오였다고 생각하니 또 한 번 충격이었다.
하긴 예전에 내가 살던 동네를 돌아다녀보면 유난히 발을 쩔뚝거리는 아저씨, 술에 찌든 아저씨들이 많았는데, 아마 그런 과거의 아픔에서 생긴 상처 아닌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상처를 가늠할 수 없지만 여전히 전두환 씨에 대한 이곳의 평은 아주 좋지 않다. 그 당시 분위기는 정말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하는데, 내 부모님들은 다행히 그 시기 서울에 계셨다.
그건 그렇고 그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 한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의 연혁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전두환 씨는 1951년 4년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육사 11기였던 영남 출신 생도 5명이(노태우 포함) 하나회의 시초인 '5성회'를 조직한다.

1955년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제25보병사단에서 소대장으로 첫 군생활을 시작한다.

1959년에는 미국 특수전 파견 교육 장교로 선발되고 제1공수특전단 본부에 배치되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기인 이규동의 둘째 딸 이순자 씨와 1959년 결혼하게 된다. (이규동의 동생인 이규광은 형 이규동을 통해 전두환의 처숙부가 되고, 처 장성희를 통해 장영자(큰손)의 형부가 되며 그의 장인과 김대중의 본처 차용애의 친정어머니가 남매간이므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척관계가 되었다.)

1961년 5월 15일 저녁부터 5월 18일 정오까지 군사 반란 성격의 정변이 일어나는데, 서울을 관할하는 제6관구의 전 사령관 소장 박정희가 주도한 것으로 당시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은 이에 가담하고 성공하게 된다. 일본육군 장교 출신 장도영은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 총장 이응준(일본육사 제26기)의 권유로 광복 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국군이 되었는데, 박정희 또한 일제치하 일본육군 장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961년 말 전두환은 육사11기들의 친목 모임을 계기로 칠성회를 만들었다. 그의 주도로 육군사관학도들은 5.16 군사 정병 지지 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이에 당시 박정희 소장의 큰 관심을 받게 된다.

1963년 1월 전두환은 중령 진급, 중앙정보부 총무국 인사과장이 된다.

1963년 7월 6일을 기점으로 전두환의 칠성회 조직은, 육사 8기를 몰아내기 위한 7.6 친위 쿠데타를 기획하였으나 실패하는데, 같은 고향 출신 세력을 키우고자 한 박정희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1963년 12월,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박정희가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다.

1967년 8월 전두환은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 대대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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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두환은 11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 29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973년 전두환은 1공수특전여단장 재직 중 하나회 리더 중 한명인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될 뻔한 위기를 넘기고

1976년 3월 차지철, 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었다.

1979년 3월 박정희에 의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전두환이 임명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총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전두환은 계엄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 수사본부장을 맡게되었는데, 12월 6일 대통령보궐선거로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민주화, 개헌요구와 학생들의 집회, 시위를 금지한 긴급조치 제9호를 12월 8일자로 해제하는데, 이는 1980년대의 서울의 봄이 찾아올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12월 12일 하나회 조직의 주도로 군부 내부의 쿠데타가 발생하여 계엄령 사령관이 교체되는 소란을 겪고 전두환은 군을 장악하게 된다.

다음 해인 1980년 서울의 봄, 긴급조치 제9호 해제로 인해, 학내 시위가 벌어지고 민주화에 대해 외치기 시작하는데, 이 시위는 전두환 퇴진, 계엄 해제 등의 예민한 정치적 현안으로도 번져 신군부의 심기를 거스르게 된다.

이와 더불어 날로 시민 시위가 격해지고 이에 5월 15일 국회 헌법개정특별심의위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양당이 합의하고, 개헌안의 정부 이송, 비상계엄 해제, 정치범 석방 및 복권 논의가 예정됐지만, 위기를 느낀 전두환의 하나회 신군부 세력은 '사회 혼란에 따른 북한의 남침 위기'를 이유로 들어 5월 17일 밤 9시 30분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국무회의에 상정하게 한다. 중동 순방 중 예정보다 하루 일찍 귀국한 최규하 대통령은 외부와 모든 통신선이 끊어지고 무장 군인들이 배치된 공포의 분위기 속 국무회의에서 단 8분 만에 아무런 토론과 설명도 없이, 결국 밤 9시 40분에 전국에 비상계엄선포를 의결하고 만다. 밤 11시 40분 꼭두각시로 전락한 최 대통령은 문화공보부 장관 이규현을 시켜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하는데, 이로써 전국은 신군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고 정치활동 또는 시위 금지, 전국 학생회장단이 모였던 이화여자대학교를 급습하여 학생운동세력을 무력화, 민주화를 요구하던 재야인사와 사회운동세력을 수배하여 검거하게 된다.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는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한다.

이후 8월 16일 신군부에 무기력했던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고,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치러진 제11대, 제12대 대통령 간접선거에서 대통령이 되게 된다.


갑자기 문득 기억의 조각이 떠오른다. 5월 18일 민주화운동의 피바람이 지나 1981년에 발매된 윤항기 목사의 '나는 행복합니다.' 같은 노래로 시민들 스스로 아픔을 잊기 위해 세뇌되려 했던 거 같고, 그와 더불어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통제적인 야간통행금지 같은 제도를 37년만에 폐지하여 자유를 주었는데, 1982년엔 프로야구(KBO)를 출범시켜 시민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따돌렸다. 또한 1983년 1월 1일부터는 50세 이상 국민에 한해, 200만원을 1년간 예치하는 조건으로 연 1회에 유효한 관광여권을 발급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한국 최초로 관광목적의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된다.(전면적 자유화는 88서울 올림픽 이후인 1989년)

그 시기 난 개인적으로 저녁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집과 멀리 떨어진 야구 경기장에서 시작되는 불꽃놀이를 상시 볼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시민들은 시끌벅적하고, 불꽃놀이 소리가 펑펑 터지면 워낙 화려하고 예뻐서 시민들은 넋을 잃고 옥상까지 올라가 그것을 보며 좋아했었는데, 아마 그것도 이 지역 사람들의 상처를 잊게 만들려는 심리적 수단이 아니었나 하고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전두환은 실제로 국민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3S(sports, sex, screen) 정책을 사용했다.) 그외에도 1983년 프로씨름 출범, 1983년 농구대잔치 출범, 1984년 한국배구슈퍼리그 출범, 포르노 테이프가 대중적으로 보급, 에로 영화 대거 제작, 1980년 컬러 텔레비전 방송의 시작, VTR비디오테이프 재생 녹화 장치의 보급, 등등..

그는 왜 결국 끝까지 그의 친구와 다른 행보를 보였을까. 모든 일엔 적절한 타이밍이 있듯, 죽기 전 그의 입으로 진실된 사과만 했어도 아픈 역사를 매듭짓고 시민들의 분노한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그가 그와 함께한 친구가 죽은 지 한 달도 안돼 사망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그만큼 그들의 우정은 끈끈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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