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2월 25일이 되면 과도한 배달업무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산타클로스, 그의 주 고객은 아이들이고 연말 배송업무를 위해 전 세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누가 착한 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 꼼꼼하게 기록하는 바쁜 일상을 보낸다. 동네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몸매에 얼굴엔 안경을 머리엔 흰색의 모피가 달린 빨간 모자, 몸엔 흰색의 모피 칼라와 커프스가 달린 빨간 코트, 흰색 모피 커프가 달린 빨간 바지, 그리고 흰 수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고 해마다 매력적인 그의 임무로 인해 기독교와 가톨릭의 크리스마스를 더 풍성하고 뜻깊게 만든다.
과연 그가 이처럼 좋은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임무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산타클로스의 실존 인물
지금의 터키 리키아 지방의 파타라에서 태어난 '성 니콜라우스(그리스어: Άγιος Νικόλαος, 영어: Saint Nicholas of Myra 또는 Nicholas of Bari, 270년 3월 15일 ~ 343년 12월 6일)'는 3세기~4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활동하였던 기독교의 성직자로, 니콜라오, 니콜라스, 니콜라라고도 불리운다.
그는 성인으로 시성 되었으며, 어린이·죄수·선원·그리스·벨기에·불가리아·시칠리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마케도니아 공화국·슬로바키아·그루지야·로렌·러시아·대한 성공회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 교회와 라틴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성도 중 한 명이지만 그의 존재에 대해 역사적인 문서에서 제대로 증명이 되지 않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에 대한 많은 전설이 전해지는데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부모님들이 일찍 돌아가시고 자신의 막대한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두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기독교인이 된 후 신부가 되었는데, 지방도시인 뮈라의 주교가 죽고 그 후계자로 마땅한 신부가 없자 다른 지방의 주교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로 신에게 간청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일 아침 제일 먼저 교회에 들어오는 자를 주교로 삼아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하는데, 뜻밖에도 니콜라우스는 그 날 뮈라에 찾아왔고, 다음날 이른 아침이 되자 제일 먼저 교회에 들어와 참배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현재의 터키 리키아 지방 도시 뮈라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시련을 겪기도 한다.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로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다음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석방되기도 한다. 또한 기독교인들의 올바르고 새로운 몸가짐, 선교 활동에 전력을 다했으며, 325년 6월 19일 현재 터키의 이즈니크의 황제 별궁에서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가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성직자를 때려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결국 아리우스파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파문되게 되는데, 자연스레 아리우스파의 교리는 걸러지게 되고 현재 '사도 신경'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니케아 신경(Symbolum Nicaenum)'이 공표되게 된다.
이런 역사적인 현장에서 니콜라우스는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더욱 확고히 하는데, 신들의 감복이었을까?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으나, 성직자를 때려 감옥에 투옥된 니콜라우스 앞에 깊은 한밤중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게 된다. 예수는 그에게 성서를 건네주었고 마리아는 그에게 오모포리온을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고 한다.
다음날이 밝아오자 경비병들은 감옥 안에서 오모포리온을 두른 채 성서를 읽는 니콜라우스를 발견하는데 이는 신의 기적이라며 모두들 니콜라우스에게 달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였다. (그때 신에게 받은 성서와 오모포리온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는 살아생전 많은 선행을 베풀었고 전설을 만들었으며 그가 죽어서도 성인으로 추앙되었는데, 하지만 니콜라우스의 유해는 터키 지역을 비잔틴 제국(이슬람)에 정복당하자 로마제국은 위기를 느껴 유해와 유물들을 옮겨야 되는 필요성이 생긴다.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지역의 '베니스'와 남부 폴리아주 지역의 '바리'와에 유치 경쟁을 하게 되는데 결국 바리가 합법적으로 이기게 된다. 바리의 상인들로 인해 터키 내 유해는 수습 후 일부를 훔쳐 1087년 5월 9일 이탈리아 바리로 그의 유물과 함께 이전하였는데 그곳에 '바실리카 디산 니콜라 예배당'을 세우게 된다.
지난 2017년 터키 남서부 안탈리아(Antalya) 주의 뎀레(Demre)에 위치한 성 니콜라스 성당(St.Nicolas Church) 지하에서 숨어있던 성 니콜라스의 무덤이 발견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던 11세기 십자군 원정 때의 남아있던 시체는 도난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성당 내부에는 성 니콜라스의 남은 유해와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바실리카 디산 니콜라 예배당으로 이전한 일부 유물의 것과 일치하였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도 발굴 작업과 성당 보존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산타클로스 굴뚝 이야기의 기원
니콜라우스 주교의 교구 성직자들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에 매진하다 보니 늘 자금이 넉넉지 못하여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고 한다. 끼니를 거를때가 많았지만 그의 선행은 멈출줄 몰랐다.
자신이 교구로 있는 지역에 세딸을 둔 가난한 아버지가 있었는데 너무 가난해 딸들을 시집보낼 수 없게 되자 그는 사창가로 딸을 팔아버릴 못된 결심을 하게 된다. 우연히 이 소식을 접한 니콜라우스는 그 가난한 딸들을 구제하고 돕기 위해 몰래 무언가 하기로 결심하는데, 그의 성격상 대낮에 대놓고 돕기는 그래서 밤이 되자 몰래 그 집 지붕의 굴뚝으로 내려가 딸들이 출가해서 결혼할 수 있을 만큼의 황금을 던져 넣었다고 한다. 근데 그 황금은 공교롭게 딸들의 양말 안에 들어가게된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창문으로 황금이 든 자루 세 개를 던져놓고 갔다고도 한다. 또는 창문이 잠긴것을 보고 굴뚝 아래로 내려갔다고도 한다.) 이로 인해 세 딸들은 사창가로 팔려갈 위기를 모면하고 결혼까지도 할수 있다고 하는데, 훗날 이 황금이 든 세 개의 자루는 성 니콜라우스를 상징하는 상징물이 되었고, 이 전설로 인해 니콜라우스가 죽은 12월 6일은 축일로 기념되며 아무도 모르게 선물을 주는 관습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밖에도 난파선의 승객을 구출하거나, 죄 없는 죄수를 사형 직전에 구출하는 니콜라우스와 관련된 전설이 많은데 그가 죽자 그의 명성은 노르만족들로 인해 유럽 곳곳으로 퍼져 나가 문화가 되었다.
또한 오늘날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출신의 바이킹을 일컫는 노르만족의 북유럽 신화(게르만족 신화)에서는 '오딘(Odin)'이 종종 굴뚝의 불구멍을 통해 들어가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민속 이야기에서 나오는 어린이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빗자루를 타는 늙은 세 여자 마녀인 '베파나(Befana)'도 굴뚝을 통해 집으로 들어가 그녀들의 얼굴은 종종 그을음이 덮여있고 착한 아이들에게는 양말에 사탕을, 나쁜 아이들에겐 양말에 석탄 덩어리를 선물로 준다고 전해진다.
▶어떻게 니콜라우스는 이름이 산타클로스가 되는가?
12세기 초 프랑스의 수녀들이 니콜라우스의 축일 12월 6일 하루 전날인 12월 5일에 과거 성 니콜라우스의 선행을 기념해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했고, 그 풍습이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7세기쯤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이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라틴어로 말하는 '성 니콜라우스(Sanctus Nicolaus)'라는 이름 대신 '산테 클라스(Sinterklaas)'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발음이 그대로 영어가 되어 19세기경 상업적인 미국의 영향으로 크리스마스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오늘날의 '산타클로스(SantaClaus)'로 불리게 된다. 유럽에서는 ‘파더 크리스마스(Father Christmas)’라고 불렸으며, 지금도 영어권 밖의 지역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곳이 많다.
▶성 니콜라우스와 우리나라와의 관계
우리나라에는 성 니콜라우스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대한성공회에서는 '서울주교좌대성당'과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성 니콜라스 대성당'을 세웠다. 그중 서울 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한 서울주교좌대성당은 1926년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주보 성인인 성모와 성 니콜라 대성당)을 축성하였는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면서도 처마장식, 기와지붕에는 한국의 건축 양식이 많이 포함된 대성당은, 일제 강점기인 1922년에 당시 대한성공회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조마가)가 주도하고, 영국인 건축가 아더 딕슨이 설계를 하여 대성당 공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자금 문제와 여러가지 당시 사정으로 인해 1926년에 부분 완성이 되어 건물이 미완성인 상태로 70여 년을 사용되다가, 1994년 성당 창립 100주년 기념으로 증축 공사를 시작하면서 1996년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이 대성당은 1978년 12월 18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이 되었고, 1987년 6월 10일에는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인 6월 항쟁이 시작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영국의 성공회와 연관이 있는지라 1999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방문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하였다.
▶미국내 상업적 성공에 따른 산타클로스의 변화
<성 니콜라스의 방문>
여덟 마리의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흰수염과 빨간 옷을 입고 아이들을 위한 선물이 가득한 가방을 들고 호호호 거리며 웃거나 굴뚝을 타고 집으로 들어가는 현재 산타클로스의 원형은 1823년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의 '성 니콜라우스의 방문(A Visit from St. Nicholas)'이라는 시집에서 처음 나오게 된다.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
산타클로스의 본래 옷색은 초록색이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붉은 옷은 1931년 미국의 대표 음료회사인 코카콜라가 겨울철 음료판매가 부진하여 붉은 색의 옷을 입은 산타클로스를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백화점에서 홍보에 나서면서 부터라고 한다.
<루돌프의 탄생>
산타클로스가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탄다는 이미지는 예전부터 있던 이야기이지만, 루돌프라는 이름의 순록이 생긴 것은 후대에 생긴 것이다. 루돌프의 이야기는 1939년 미국 백화점 광고부에 근무하던 로버트 메이라는 직원이 만든 동화로 부터 시작한다.
산타클로스의 썰매를 이끄는 순록의 마을엔 유달리 붉고 빛나는 코를 가진 순록 루돌프가 살았다. 하지만 그 순록은 특이한 외모로 다른 순록들로 부터 따돌림과 왕따를 받게 된다. 그러던 로켓배송을 하던 크리스마스 이브날 안개가 심하게 끼어 썰매를 끌게 힘들게 되었는데 모두가 난처하던 상황에서 산타는 고심끝 불연듯 생각하고 "너희들 중에 반짝이는 불빛을 가진 아이가 있지 않니?"라고 묻자 순록의 리더인 돈더는 마을에 루돌프라는 순록이 있다고 산타에게 알려준다. 곧장 루돌프가 있는 언덕에서 루돌프를 찾게되는데, 괴롭힘에 지친 루돌프는 슬픈얼굴로 가지 않겠다고 한다. 이에 순록의 리더 돈더는 바쁜 선물 배송업무에 순록들의 에로사항을 눈치채지 못했다며 이를 자책했고, 산타는 슬퍼하는 루돌프를 보며 누구에게나 장점은 있다며 어두운 밤길을 비출수있는 루돌프에 빛나는 코를 칭찬한다. 또한 자책하는 리더 돈더에게 위로를 전했고 루돌프는 산타의 칭찬에 썰매를 앞장서 이끌게 된다. 이에 다른 순록들은 반발이 거세지긴했지만 빛나는 코로 안개낀 하늘을 달리는 루돌프에 대해 감탄하며 그제서야 따돌림하던 다른 순록들은 루돌프를 동료로 받아들이게 된다. |
이 동화에는 사연이 있는데, 동화를 만든 로버트 메이의 아내 에블린 메이가 암에 걸려 투병을 위해 항상 집에만 있게 되자 이를 본 로버트 메이의 딸이 다른 집의 엄마들과는 다른 엄마를 보며 항상 슬퍼했다. 이를 본 아버지 로버트 메이가 딸과 가족들을 위하여 만든 것이 루돌프 동화인데, 이 이야기를 좋아했던 아내는 잡지사로 글을 기고하길 원했고 결국 남편 로버트는 '워드'라는 잡지사에 이 동화를 기고해 크게 성공하게 된다. 이로 인해 루돌프라는 브랜드가 생기고 산타와 루돌프는 땔 수 없는 미국 문화로 자리 잡게 된다.
▶각기 다른 성탄절
보통 한국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등의 성탄절은 12월 25일이지만,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러시아계 국가와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1월에 성탄절을 맞고, 러시아는 13일이 늦은 1월 7일에 성탄절 예배를 하며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한다.
▶진정한 산타의 얼굴
성 니콜라우스의 그림을 토대로 한 골격과 역사적 자료를 이용해 그의 얼굴 이미지는 영국의 리버풀 존 무어레스 대학(Liverpool John Moores University)의 얼굴 연구소에 의해 안면 재건 시스템과 3D 인터랙티브 기술을 사용하여 복원에 성공하게 된다.
드디어 우리는 드디어 진정한 산타의 얼굴을 확인하게 되는데요. 기대와 다르지 않게 우리가 알던 포근한 인상의 수염난 산타의 이미지와 아주 비슷한 것 같다. 또한 특징적인 점은 복원된 초상화에서 심하게 부러진 치유된 코가 보여진다는게 주목할 점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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